방앗간 집 조수, 김씨네 셋째 딸
방앗간 집 조수, 김씨네 셋째 딸
  • 한만정 기자
  • 승인 2020.08.10 08: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방앗간 집 조수, 김씨네 셋째 딸
방앗간 집 조수, 김씨네 셋째 딸

아버지는 다시 방앗간을 시작하셨다.

언니들은 시집가고 동생들은 공주에 나가있어서 방앗간은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열여섯, 아버지의 조수가 되어 방앗간 일을 돕게 되었다. 발통기를 들고 집집마다 다니며 벼를 쪄주고 삭을 받아왔다.

쇳덩이가 무겁기는 얼마나 무거운지 소리는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어찌나 큰지, 눈썰미가 좋아서 기계도 알려주면 남자 못지않게 잘 다뤘다.

그래서 어쩌면 사서 고생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할 줄 모르면 난 그냥 꾸지람은 듣더라도 몸은 편했겠지, 하지만 고생하시는 어머니 생각에 그리고 아버지를 도울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끓어오르는 책임감이 작은 몸으로 발통기를 들고 이집 저집 다니게 했다.

조그만 여자애가 발통기를 돌리는 모습에 사람들은 다들 신기한 듯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난 부끄러운 것도 잠깐,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멈추자 남들의 시선은 다 거추장스러웠다.

문제는 발통기가 고장 났을 때다. 잘 돌아가던 발통기가 어느 날 갑자기 멈추면 그날은 보통 난감한 게 아니다.

그 진땀 빼는 날이면 난 발통기를 들고 공주 가는 버스에 오른다. 무거운 것을 들고 터덜거리는 시골버스 안에서 얼굴로 흘러내리는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끈끈한 물기가 나를 또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버스에 내려 기계를 고치는 집으로 찾아가, 손을 보고 다시 버스에 오른다.

무슨 마음으로 열여섯 어린나이에 그렇게 해냈는지 잘 살아야 한다는 그 의지가 나를 억척스럽게 만들었지만 진실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어려울 때 일수록 진실해야 하고 꼼수를 쓰면 안 된다. 그렇게 방앗간 일을 부녀지간에 1년 정도 했다.

돈이 되는지 어떤지 나는 종잡을 수 없었고 그저 부모님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발통기 방앗간으로는 돈 벌이가 시원찮았던 모양이었는지 아버지는 다시 광산으로 눈을 돌려 금광을 했다.

아마 아버지는 그간의 실패를 금맥을 잡아서 한 번에 만회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요즘 말로 금광은 로또였다.

살림은 갈수록 더 기울고 그 놈의 금맥은 어디에 있는지... 금은 캐도캐도 나오지 않았다. 있기는 한 걸까?

혹시 허영심 잔뜩 든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신기루 같은 것은 아닐지.

금광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 부푼 희망을 가지고 오로지 금맥을 찾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다. 매일 희망과 절망의 경계를 수도 없이 오고 간다.

그 인내의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맞이하는 그 포기와 절망은 망연자실과 함께 사람을 깊은 수렁으로 빠뜨려버린다.

아버지는 마음이 오죽 급했던지 “이모네 소라도 끌고 와라”

어머니를 몰아붙였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 욕심이 당신과 가족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모르셨다.

매일 땀 흘려 일해서 얻어지는 보상과 열매에 우리는 좀 더 귀 기울여야 한다. 일확천금이 곧 一場春夢(일장춘몽) 이다.

방앗간 집 조수, 김씨네 셋째 딸
방앗간 집 조수, 김씨네 셋째 딸

## 아, 내몰린 결혼. 운명의 길모퉁이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실패로 가세가 기울자 입하나라도 덜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결혼, 그 때 결혼은 인생의 황홀한 출발이 아닌 그저 어려운 살림에 입하나라도 덜자는 궁여지책이었다.

그땐 다들 그렇게 어려웠고 우리의 선택이 삶의 질과는 무관할 수밖에 없었다.

광산까지 실패하자 난 더 이상 집에서 부모님의 짐이 되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큰아버지가 “영숙이 시집가야겠다. 정월 보름날 우리 집으로 오너라”

시집이라니.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인지.

스물셋,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 결혼은 생각조차 안 해봤다. 하지만 그땐 결혼도 하라면 해야 하는 때였다. 여자들에겐 생각이나 자기의지라는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뭐가 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날짜에 난 큰아버지 집으로 갔고 머리를 빡빡 깎은 낯선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삼 삼장에서 일하는 그 남자는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라 까무잡잡했지만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였다.

쑥스러울 것도 없고 아무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설렘이나 쑥스러움이 있었다면 서글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물셋, 나에게 주어졌던 결혼이 그저 오늘 지나 내일 만나듯이 아무 생각 없이 받아져야 한다는 건 알고 보면 슬픈 일이다. 하지만 그 조차도 느낄 수 없었으니 말 그대로, 환경에 내몰린 결혼이 되었다.

“공주에 다녀옵시다.”

어색한 만남 속에서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그는 무뚝뚝한 말을 건네며 나를 데리고 공주로 갔다.

그 때는 처음 본 남자여자가 그렇게 결혼을 하고 백년해로를 약속 하며 부부가 되었다.

나만의 불행한 삶이 아닌, 그 시절을 살았던 우리들의 비슷한 결혼 풍속도였다.

그는 공주 금은방에 가서 나에게 시계를 사줬다. 낯선 남자와 함께 갔던 금은방, 진열된 시계가 마음에 드는지 예쁜지 아무생각이 없이 그저 기계처럼 움직였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그 때는 그렇게 결혼해서도 천생연분이라는 말로 위로하면서 부부라는 책임감으로 잘 살아냈다.

남편과의 어설펐던 첫 만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의 인연이 되었다.

 

스물셋, 정월 보름에 만나 3월22일 결혼을 했다. 그 남자는 60년 가까이 함께 하는 남편 박승진 장로이다.

그때는 마음에 드니 안 드니 싫으니 좋으니 그런 생각은 사치였다. 어른들이 만나라면 만나고 결혼하라면 하는 시대였다.

물론 어이없지만! 그렇게 만나도 서로에 대한 책임감으로 인내하면서 가정을 꾸려나갔다. 딸을 준비 없이 시집보낼 수밖에 없는 부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지만 살림도 기울고 광산은 남자들이 드글드글 한 곳이라 과년한 딸과 같이 생활하는 것이 부모님도 편치 않으셔서 차라리 나를 시집보내는 것이 딸을 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셨다.

처지가 처지인 만큼 결혼에 대한 내 생각이나 입장은 없었다. 무감각했다. 좋은지 싫은지도 구분이 안 갔고 그냥 어려운 환경에 내몰린 결혼을 했다.

만난 지 불과 두 달여 만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번갯불에 콩 볶듯 했지만 고민하고 생각할 겨를이 나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부모님도 딸을 내몰듯이 결혼시키는 마음이 왜 아프지 않았을까. 바리바리 챙겨서 보내고 싶으셨지만 그렇지 못한 어머니의 마음은 애가 탔다.

우리 아이들 결혼시키면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음을 다시 읽을 수 있었다. 결혼식, 마음을 어디에 둘지 몰랐는데 그날따라 비까지 또 주룩주룩 내려서 내 마음을 더 울적하게 만들었다.

내 손을 꽉 잡아 주시던 어머니, 서운한 마음이 어머니의 붉게 충혈 된 눈으로 다 읽혀졌다.

난 애써 눈물을 참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며 견뎠다.

타들어 가는 마음에 그나마 촉촉한 봄비가 작은 위안이 되었다.

초라한 혼례상 일지라도 앞마당에 차려두고 결혼을 해야 하는데 내리는 비를 피하느라 창고에서 결혼식을 치루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결혼식, 스물셋 한창 예쁠 나이에 그렇게 결혼을 하고 부모님 품을 벗어나 새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결혼사진 한 장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그날은 사진사도 마땅치 않아서 결혼사진도 남기지 못했다.

비를 피하겠다는 단순한 생각만으로 창고에서 결혼을 하고 그렇게 어설픈 모습으로 신혼은 시작됐다.

비가 와서 지푸라기를 쭉 깔아놓은 앞마당 창고에서의 서글픈 결혼식, 주룩주룩 내리는 비 까지 나의 시집가는 날은 그렇게 구슬픈 진풍경을 그렸다.

그리고 시댁으로 갔다.

아 마루 바닥은 삐거덕 거리고 처마가 머리끝에 닿는 곤궁하기 짝이 없는 집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