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패막 하나 없는 들판의 민들레꽃처럼... 안희연 어르신
방패막 하나 없는 들판의 민들레꽃처럼... 안희연 어르신
어르신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
  • 한만정 기자
  • 승인 2020.12.08 1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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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어르신
안희연 어르신

대문 없는 널따란 마당에 들어서니 반들반들 윤기 나는 배추가 정갈하게 줄맞춰 앉은 텃밭이 먼저 나를 반겼다.

낮은 담장 곁으로 웃자란 가을꽃이 살랑대며 반기고 맞은편엔 가지와 고추나무가 키 재기를 하며 어우러져있다. 밭고랑 사이로 주인의 부지런한 발길이 스며든 자리마다 햇살들은 도란도란 모여들었다.

정겨운 마음을 풀어내는 사이 어르신이 환히 웃으시며 살갑게 다가오셨다. 

악몽 같던 기억의 파편들‘논떼기 밭떼기 하나 없는 가난한 집’ 어린 시절 우리 집을 일컫는 말이다.

8남매 중 딸로는 맏이로 태어났다. 그래도 아버지가 희연이라는 예쁜 이름도 지어주셔서 사랑받았다. 친구들 이름은 춘자 경분이 연심이 언년이 였지만 내 이름은 50년은 앞서가는 이름이었다.

부모님은 층층 자식들을 낳고 없는 살림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것저것 안 해 본 것 없이 사셨다.

“내가 11살 때였으니 왜정 때였어. 어느 날 갑자기 일본 놈들이 와서 날 끌고 가려했어. 울며불며 안간 다고 아버지 바짓가랑이 붙잡고 버텼는데 왜정 때라 꼼짝 못하고 끌려갔지. 동네에서 내 또래 둘이 끌려갔어. 어디로 가는지 도무지 알 수도 없지, 일본 놈들은 총부리 겨누고 있지, 말도 마 친구랑 둘이 손 꼭 잡고 바들바들 떨면서 갔어. 부산에 있는 무슨 방직 공장이었는데 매일 실을 뽑게 하고 얼마나 일을 시켰나 몰라. 공주에서 부산이 지금도 먼 거리인데 그 옛날에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어. 일 못한다고 ‘빠가야로’ 소리를 얼마나 들었나.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어. 밤마다 베갯잇 다 적시고 아침이면 눈이 퉁퉁 부었지. 죽을 고생을 하며 1년쯤 되었을까. 어느 날 아버지가 날 데리러 오셨지 뭐야. 꿈인가 생시인가 분간도 안 갔어, 해방이 되었다는 거야, 이제 살았구나 싶었어. 아버지 따라 열차를 타고 오는 길에 혹독했던 일이 생각나 죽어도 아버지 팔을 안 놓치려고 꽉 붙잡고 있었어. 다리는 연신 후들거렸지. 그때의 심정을 어찌 말로 다 하겠어. 그렇게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 어려운 집안일을 도우며 살았지."

나는 사연이 많은 사람이야. 내가 18살 때 시집을 갔어. 집안 고모의 중매로 신랑을 만났는데 나보다 7살 위였어. 신랑이 군대 가야한다고 급하게 날을 잡았지. 피난 가듯 밤에 몰래 걸어서 산을 넘어 이곳 시댁에 와서 결혼을 했어. 결혼하던 그해 6·25가 터진거야. 결혼일이 음력 7월 7일 칠석날 이었는데 엄청나게 더웠어. 전쟁터진지 한 달 후쯤 이었는데 결혼식날도 하늘에는 미군비행기가 왱왱 굉음을 내며 날아다녔어. 맞절하느라 족두리 쓰고 두 팔에 얼굴을 묻고 있었는데 초례상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지 귀청 떨어지는 소리가 났지 뭐야. 엎드려서 이쪽 저쪽 쳐다보니 사람들이 온데간데가 없는거야 나만 덩그러니 있고 다들 도망들을 갔지 뭐야. 전쟁 난리 통엔 살아남는 게 양반이라더니 그 꼴 이었어. 신랑도 얼떨결에 냅다 도망부터 친 거지. 그러고 살았네

허허.”세상에나! 어린 신부를 놔두고 모두 도망이라니.

안희연 어르신
안희연 어르신

마음이 아리면서도 실소가 터졌다. 어르신도 기가 막히지 않냐며 폭소를 터트렸다. 간담이 서늘한 그 시절 얘기를 담담하게 들려주셨다.

88세라는 연세가 무색할 정도로 또렷하고 굳건하셨다.

때때로 회한이 밀려오는지 지그시 눈을 감으시고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부채를 찾으셨다.

어쩌면 악몽 같았던 시간도 세월에 떠밀려 희미해져 이제는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을 만큼 숨통이 트였다.

앞마당 텃밭은 내 일상의 친구결혼 후 신랑은 군대를 갔는데 얼마 안돼서 집으로 돌아왔다. 몸이 너무 허약해서 왔다는 거다. 나는 아들 셋 딸 하나 4남매를 두었다. 가난은 늘 꼬리를 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힘들었던 때가 아이들 낳아 기를 때였다. 애기 업고 모내기 하고 소 풀 먹일 때 힘에 부치고 너무 힘들어서 많이 울기도 했다.

아이들이 모두 학교 다닐 때 영감이랑 함께 장사를 다녔다. 영감은 벼농사를 근근이 하면서도 채마장사, 감 장사, 포도장사 등 안 해본 것이 없었다. 영감은 부지런하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한 번은 리어카에 감을 싣고 함께 공주장 가는길인데 장마철 홍수에 리어카가 휩쓸려갔다. 물살이 얼마나 무서운지 떠밀려 가는데 대책이 없더라고. 영감이 간신히 빠져 나왔는데 물귀신을 만났나 눈이 다 풀리고 넋이 나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지나고 보면 우리들의 인생은 매순간 목숨을 담보로 잡고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한 생각이 든다.

그렇게 열심히 살던 영감이 야속하게 59세에 환갑도 못 차려먹고 황망히 가버려서 내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사는 거 어려워서 애들도 제대로 못 챙긴 건 말 할 것도 없다. 특히 큰아들은 자랑 같지만 공부를 잘해서 교대 나와 교장으로 퇴직했다. 대학 보낼 형편이 안 되는데 혼자 알아서 시험보고 합격했다. 속으로 대학 떨어지라고 기도했다면 누가 믿을까. 가르칠 형편이 안되니까. 그러니 속은 속대로 새카맣게 탔다.

기억력 좋다는 말을 많이 들으셨다는 어르신은 자녀들 초중고 학교명과 일들을 또렷하게 되짚으셨다. 어르신의 총기가 세월도 밀어내는 것 같았다.

먼 옛일들을 소환하다보니 구릿빛 어르신 얼굴에 스치는 쓸쓸함과 무수한 사연에 햇살도 더디게 지고 있었다. 

나는 말을 하자면 할 말이 산더미처럼 많다. 늙어가지만 내가 건강해야 자식들한테 신세지지 않을 것 아녀?

나이도 들었고 힘든 일을 겪다보니 허리도 안 좋고 다리도 많이 아프지만 그저 움직이고 뭐라도 해야 하는 성질이라 가만있질 못한다. 

그 바지런한 발걸음이 아직까지 총기를 놓지 않는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TV도 보고 동네 한 바퀴를 돈다. 소일거리로 앞마당에 텃밭을 일궈 채소를 심어 가꾸고 보듬는 게 내 일이다. 물주고 정성을 들인 만큼 쑥쑥 자라주는 식물을 보면 나도 힘이 생긴다. 집을 나서면 마을 회관 앞에서 이웃동상들과 수시로 두런두런 얘기 나누는 맛도 재미지다. 

그런데 매일 은근히 기다려지는 행복도 있는데, 혼자 살고 있는 나를 위해 매일 저녁 9시쯤이면 큰아들한테서 전화가 걸려온다. 하루를 별 탈 없이 잘 보냈는지 안부를 물어주곤 한다. 

이젠 전화 안 오면 걱정이다. 젊은 애들 말하는 그 데이트다, 전화 데이트. 

내가 이웃집 마실도 가고 공주장에 나가 머리파마도하고 구경 갔다 왔다고 하면 아들이 너무 좋아하고 잘한다고 칭찬해 준다.

아들이야 혼자 있는 내가 자리보존하고 누워있을까 한 걱정 할텐데 내가 여기저기 다닌다니 한숨을 놓을 거다.

그나저나 요즘 전염병이 큰 문제다. 만고풍상 겪으며 살면서 전염병도 많이 돌았지만 코로나처럼 무서운 게 없었던 거 같다. 세상이 난리가 아니잖아?

사람 만나기가 겁나고 쉽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제 여한은 없는데 우리 자식들 사는 세상이 편안해야 할텐데 걱정이다.

어렵던 시절을 헤치며 꿋꿋하게 살아오신 어르신의 삶의 여정이 방패막 하나 없는 들판의 민들레를 닮으셨다.

나오는 길에 활짝 웃으시며 배웅해주시던 어르신 곁으로 마당 한가득 푸른 기운이 가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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