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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날짜 [ 2020년09월27일 16시26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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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마다 삶의 모습은 달랐지만 근간은 ‘德(덕)’ 이었다 1
어르신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 [오복수 어르신 편]
시절마다 삶의 모습은 달랐지만 근간은 ‘德(덕)’ 이었다 1

‘오복수 성덕순’ 사이좋은 문패, 그 집의 파란대문은 활짝 열어 젖혀 있었다. 반가움은 잠시 거실 문이 열리며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는데.” 선생님의 첫 마디였다.

기자의 어깨에 카메라를 짊어진 거창한 인터뷰를 생각하셨나 보다.

질문지가 오고가며 궁리를 하는 인터뷰가 아니다. 그저 기억에서 파편처럼 떠올려지는 크고 작은 일들이 다 우리의 역사다.

거실 한 면이 손주들 사진으로 빼곡하다. 녀석들은 돌배기 때 앙증맞은 모습 그대로지만 지금은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그렇게 20년간 선생님의 아침을 흐뭇하게 열어준 손주들이다.

손주들 사진에 싱글벙글하는 영락없는 할아버지지만 70대 청년인 오복수 선생님. 덕장의 풍모 덕분인지 집안 곳곳 선생님의 향기가 배어있었다.

 

소용돌이쳤던 유년

1945년생인 나의 까무룩한 첫 기억은 6.25다.

어렴풋이 피난길에 겁먹은 여섯 살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엄마 손을 놓칠세라 잰걸음으로 발길을 옮기며 포화 속에서 살아남았다.

청산면 명티리에서 경상도 경계인 예곡리까지 피난을 갔다. 여름에 시작된 피난길은 무더위와 싸워야 했고 겨울날의 피난길은 까치랑 밥을 나누어야 했다.

배를 채우려고,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가느다란 줄기에 달랑거리는 감도 따서 끼니를 대신했다.

밤이 되면 폭격소리에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공포를 안고 다리 밑으로 모여들었다. 불이 다 꺼진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공포에 질린 눈망울만 서로 주고 받으며 피난길 위에서 목숨을 건져냈다. 전쟁 중에는 그저 살아남는 게 양반이다.

시절마다 삶의 모습은 달랐지만 근간은 ‘德(덕)’ 이었다 1

나는 예곡국민학교를 다녔다. 청산국민학교의 분교였다.

지금은 아이 울음소리가 사라진 시골, 그 동네의 학교들이 교적비만 남긴 채 폐교의 수순을 밟고 있지만 그 당시 청산국민학교는 예곡, 청동, 신매, 대성리등 네 군데의 분교를 거느린 큰 모교였다.

청산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청산의 인구가 14,000명가량 되었다.

60년 전의 청산은 장이 서는 날에는 遠近各處(원근각처)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곳이다. 세월 속에 그 영화는 사라지고 생선국수의 명소로 아직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명티리에는 월명광산이 있었다. 아버님은 광산 하청 사업을 하고 계셨는데 광산 굴 하나를 맡아서 탄을 캐내고 수익을 배분했다.

아버님은 광산에서 일하시다가 하청 사업으로 전환한 분이셨다. 광산 하던 오씨네,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동네에서 유지소리 듣던 집이었다.

 

나는 예곡국민학교에 다녔는데 청산중학교는 10리를 매일 걷는 등굣길이 너무 멀어서 자취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광산사고로 1년 반 동안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셨다.

가장의 추락은 집안을 위기로 몰아간다. 형과 나는 탄 찌꺼기를 주워서 학비에 보태기도 했다. 탄가루는 상품으로 나가고 덩어리는 난방용 구공탄 만들 때 쓰였는데 화력이 좋았다.

광산 하던 집 아들이었지만 얼굴에 새카만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씁쓸하게 하얀 이만 드러내는 한 때를 보냈다.

시절마다 삶의 모습은 달랐지만 근간은 ‘德(덕)’ 이었다 1

아버지의 광산사고로 일단 대학진학부터 포기하게 되면서 인생이 뜻대로 안된다는 것을 알았고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절망의 고배도 마셔보았다.

학창시절 뜀박질을 잘하던 나는 청산에서 육상 1등으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청주까지 나가보면 경쟁자들 속에서 만년 2등에 머물렀다.

육상 실력은 군대생활과 동떨어지지 않아 공수 특전단으로 복무했다. 공수 특전단 훈련은 1년 반 동안 밥만 먹으면 무술, 뒤돌아서면 사격훈련 이었다. ‘사나이’로 중무장되는 훈련의 연속이었다.

 

키 작은 소나무들로 둘러싸인 청산 성당이 나를 붙들었다.

제대하고 바로 인천 제일제당에 취직을 했다. 바다를 매립해서 지은 엄청난 규모의 회사. 그 수만 평의 광활한 땅에 시골 촌놈인 내가 운신할 미래는 단 한 평도 없었다.

1,200명 직원 중 정식직원 260명, 나머지는 20년이 지나도 별수 없는 임시직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곳은 내가 머무를 곳이 아니었다.

다시 세상으로 나와 진로를 선회하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제일제당, 회사는 거대한 공룡이었지만 임시직에게 비전은 없었다. 타사로 이직을 결정한 후에 고향에서 연락이 왔다.

시절마다 삶의 모습은 달랐지만 근간은 ‘德(덕)’ 이었다 1

성당에 교적정리가 제대로 안됐다고 신부님이 요청을 했다. 우리 가족은 다들 신자들이었다.

멀리 나와 있는 나에게까지 굳이 연락을 했어야만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시’라는 생각에 가벼이 옥천 행 기차에 올랐다. 3개월 동안 교적정리를하고 다시 올라가겠다는 계획으로 청산에 내려왔지만 나는 그만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바다를 매립한 수만 평의 제일제당은 나를 보듬지 못했지만 6천 평 키 작은 소나무들로 둘러싸인 청산 성당이 결국 나를 붙들었다. 할 수 없이 눌러앉았지만 그것이 진짜 내 자리가 되었다. 직장 군대 마치고 10년 만에 청산으로 돌아왔다.

1971년도 30대 초반, 아내와 큰 아이를 데리고 고향에 정착하게 되었다. 24살 때 동갑내기 아내 성덕순(카타리나)과 결혼하고 타향살이 10년 만에 고향의 품에 안겼다.

고향은 역시나 잠시 등 돌렸던 나를 두 팔 벌려 안아주었다.

3개월이면 정리될 것으로 짐작한 교적정리는 하 세월이었다.

1,500명 신자의 교적정리가 15년 동안 잠자고 있었다. 얼마나 일이 많은지 평생을 걸어도 다 못 끝낼 것 같았다.

교적 정리는 출생신고처럼 신자들의 주소 이름 영세 견진 혼배성사 등을 기록으로 남긴다. 수기작성으로 3개월간 매일 했는데 끝을 모를 일이 되었다. 신부님이

 

“가지 말고 나랑 있자”

한국말을 잘하셨던 미국 신부님의 간청도 있었지만 고향이 끄는 힘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5년 정도 사무장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아름다운 성당이 내 청춘의 빗장을 열어 젖힌 포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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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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